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19. 19世 〉13. <부정공>학생공휘진필묘표(學生公諱鎭弼墓表)
1. 문헌 목록 〉19. 19世 〉15. <부정공>학생공휘영보가장(學生公諱永寶家狀)
1. 문헌 목록 > 19. 19世 >  
14.<부정공>통정대부부호군공휘영진묘갈명(通政大夫副護軍公諱永振墓碣銘)
通政大夫副護軍公諱永振墓碣銘 趙君炳寬狀其先先王考事行十舍重跰托以阡道之刻不佞病廢無文固辭不敢而厥懇愈篤遂按狀而書之曰公諱永振字大汝玉川趙氏以高麗門下侍中諱璋爲上祖歷二世諱元吉號農隱典工判書玉川府院君諡忠獻享武夷院生諱瑜號虔谷官副正盡孝盡忠入本 朝以旌以祠後有井邑縣監諱智崑泰仁縣監諱大承訓鍊奉事諱珏俱以行誼著世曰重命曰廷仁曰河祥寔公曾祖禰三世也妣順興安氏孝采女文成公裕后供以仁陵乙酉二月二十五日生稟性剛正氣容儼重平生事爲未嘗有一毫假飾家貧親老躬執耕稼雖不克從事編而孝友篤行盖非讀書之士所能及也以學未成就常自痛歎敎誨子孫靡誠不殫或設爲家塾延聘賢師或使之負笈遠方從遊士友備貯經史爲講習之資而與鄕子弟共之篤於奉先祭祀齋沐如在之誠於累世祭田石儀之未遑者並竭力營辦宗族婚葬之費春秋花樹之會亦各有成規友于兄弟庭無間言撫育孤姪一拏己子律身則峨冠潤袖謹守先王之遺制奇技淫巧斥絶異國之珍玩齊家則巫祝尼媼不入于門博奕樗蒲不設於座持身敬謹處事精詳親戚朋友一以誠信相與無機闕畛域若保養精神壽踰大耋而氣貌筋骨無捐盛年則盖有得於程叔子以忘生徇欲爲深恥之訓者也 高宗壬寅以優老恩陞通政大夫副護軍戊申十二月六日考終于寢享年八十四葬大光山西陽洞上麓負壬原配淑夫人慶州金氏龍浩女貞靜柔嘉婦德甚備生先公一年卒後公七年乙卯二月十九日壽九十二墓蛤洞山乙坐擧六男滿根都事東根在根壽根昌根洪根孫男炳寬都事出炳賢炳烈炳淑張爀鎭妻東根出根出炳表安圭伯妻在根出炳元南元熙許相金道妻壽根出炳學炳贊金箕南鄭爀朝妻昌根出炳學系洪根後炳寬龍基炳賢男南基良基占基炳表男元基亨基炳元男明基炳烈男文基仲基銘曰十室忠信一鄕善士居今衰季惟公是巳孝悌謹飭鮮興倫此誰曰未學吾必謂矣衣履攸藏大光之峙刻此貞石用告千禩 月城 崔永祚 撰 통정대부부호군공휘영진묘갈명(通政大夫副護軍公諱永振墓碣銘) 조병관(趙炳寬)이 그의 선왕고(先王考) 사행(事行)을 써서 들고 三백리 먼길에、 나를 찾아와 묘도에 쓸 글을 부탁한다。 내가 병으로 글을 쓰지 못한다고 구지 사양했으나、 그의 간청이 더욱 그러하여 결국 그 행장(行狀)을 살펴보고 이렇게 쓰게되었다。 공(公)의 휘는 영진(永振) 자(字)는 대여(大汝)이다。 옥천조씨(玉川趙氏)는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장(璋)이 시조(始祖)이며 二대(二代)를 지나 호(號)가 농은(農隱)인 원길(元吉)은 전공판서(典工判書)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시(諡) 충헌(忠獻)인데 무이서원(武夷書院)에 배향되어 있고 그의 아들 유(瑜)는 호(號) 건곡(虔谷) 관(官) 부정(副正)인데 충(忠)과 효(孝)로 본조(本朝)에 들어와 정려(旌閭)와 사(祠)를 받았다。 그 뒤 정읍현감(井邑縣監) 지곤(智崑) 태인현감(泰仁縣監) 대승(大承) 훈련봉사(訓鍊奉事) 각(珏)은 모두 행의(行誼)로 세상에 알려졌다。 중명(重命) 정인(廷仁) 하상(河祥)은 공(公)의 증조(曾祖) 조(祖) 고(考) 三세(三世)이며 비(妣)는 순흥안씨(順興安氏) 효채(孝采)의 딸로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예(後裔)이다。 공(公)은 순조을유(純祖乙酉一八二五)년 二월 二十五일에 태어나 서융이 강정(剛正)하고 기용(氣容)이 엄중(儼重)하여 한평생 모든 일에 조금도 가식이 없었으며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 늙으므로 직접 농사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책을 대하여 공부하지는 못했으나 효우(孝友)와 독행(篤行)만은 글 읽은 선비도 따르지 못할 만큼 독실했다。 또 자신이 학업을 이루지 못한것을 뼈아프게 여긴 나머지 자손 가르키는데 성의(誠意)를 다하여 집에다 서당을 차려놓고 훌륭한 선생을 모셔다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책을 가지고 먼곳에 사우(士友)를 찾아가 공부하게 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경사(經史)도 마련하여 강습(講習)의 자료가 되도록 해놓고 마을에 자제들과 함께 강논하게 하였다。 선조(先祖) 받들기를 극진히 하여 제사(祭祀) 재목(齊沐)에 여재지성(如在之誠:정성이 지극하면 곁에 계신것 같음을 느낀다함)을 이루었고 여러 대에 걸쳐 아직도 마련하지 못한 제전(祭田) 석물(石物)에 있어서도 마련하는데 힘을 다하였고 종족(宗族) 혼장(婚葬)의 비용과 봄·가을 화수회(花樹會)에도 제각기 알맞게 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하여 집안에 서로 사이말이 없었고 외롭게 된 조카들도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 높은 갓과 넓은 옷소매로 자기몸을 닦으며 선왕(先王)이 물려주신 제도를 철저하게 지키는 반면 기기(奇技) 음교(淫巧)를 비롯해서 다른 나라의 보기 좋은 물건을 상대하지 않았으며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 무당과、 중、 노파를 집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고 장기 바둑을 자리에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몸가지기를 경근(敬謹)하게 하고 일 처리할 때는 세밀하게 하는등 친척붕우(親戚朋友) 사이에도 한결같이 성(誠)과 신(信)으로 할 뿐 서로 사이를 두지 않았다。 그러한 정신을 잘 함양하여 八十세기 넘도록 기골(氣骨)이 젊은이에 비해 손색이 없었으니 이는 아마도 정이천(程伊川)이 말한 『자기를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은 심한 수치다』〈忘生徇欲爲深耻〉라고 한 교훈을 받은 때문이리라。 고종임인(高宗壬寅:一九○二)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부호군(通政大夫副護軍)의 은전을 입고 그뒤 六년뒤인 무신(戊申) 十二월 六일 八十四세 나이로 세상을 떳다。 그리하여 장사는 대광산(大光山) 서양동(西陽洞) 산윗기슭 임원(壬原)에 장사했다。 부인 숙부인(淑夫人)은 경주김씨(慶州金氏) 용호(龍浩)의 딸로 정정유가(貞靜柔嘉)하여 부덕(婦德)을 다 갖추었는데 공(公)보다 一년 먼저 태어나 공보다 七년뒤인 을묘(乙卯) 二월 十九일 九十二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는 합동산(蛤洞山) 을좌(乙坐)에 있다。 六남(六男)을 두었는데 만근(滿根)은 도사(都事) 동근(東根) 재근(在根) 수근(壽根) 창근(昌根) 홍근(洪根)이다。 손남(孫男)에 병관(炳寬)은 도사(都事)가 낳고 병현(炳賢) 병렬(炳烈) 병숙(炳淑) 장혁진(張爀鎭) 처는 동근(妻東)이 낳고 병표(炳表) 안규백(安圭伯)처럼 재근(在根)이 낳고 병원(炳元) 남원희(南元熙) 허상(許相) 김도(金道)의 처는 수근(壽根)이 낳고 병학(炳學) 병찬(炳贊) 김기남(金箕南) 정혁조(鄭爀朝)의 처는 창근(昌根)이 낳았는데 병학(炳學)은 홍근(洪根)의 양자가 되었다。 병관(炳寬)의 아들은 용기(龍基) 병현(炳賢)의 아들은 남기(南基) 양기(良基) 점기(占基) 병표(炳表)의 아들은 원기(元基) 형기(亨基) 병원(炳元)의 아들은 명기(明基) 병렬(炳烈)의 아들은 문기(文基) 중기(仲基)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十실의읍(十室之邑)에 충신(忠信)나고 一향에 선사 난다는데 十室忠信一鄕善士 요즘 같이 쇠(衰)한 세상 오직 공이로세 居今衰季惟公是己 공의 효제、 공의 근칙 뉘라서 짝을 하랴 孝悌謹飭鮮興倫比 배우지 못했을망정 나는 말하리 誰曰未學吾必謂矣 대광(大光)의 잿마루 잠든 유택에 衣履攸藏大光之峙 곧은 돌 깎아세워 천세에 알리노라 刻此貞石用告千禩
 
1. 문헌 목록 〉19. 19世 〉13. <부정공>학생공휘진필묘표(學生公諱鎭弼墓表)
1. 문헌 목록 〉19. 19世 〉15. <부정공>학생공휘영보가장(學生公諱永寶家狀)